언젠가의 하늘


죽을 때까지 자유롭지 못할 걸 알고
올려다본 하늘

by 오즈 | 2010/01/06 08:53 | 오즈의 인생공장 | 트랙백 | 덧글(4)

파이브 스타 스토리







 
 
 













나는 만화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다고 매일 만화책을 빌려다 쌓아놓고 보지는 않는다.
사실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과거에, 그러니까 20대 초반에 만화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초등학교 1~2학년 때부터 우리집에는 만화책이 아주 많았다.
이유인 즉, 당시 대학생 과외를 하던 숙부가 월급을 받으면
한 달에 한 번씩 만화책을 사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로는
<꺼벙이> <선달이 여행기> <로봇 찌빠> <보물섬> 등등이 있다.
그게 단행본으로 300~500원 할 때니 참 오래된 이야기다.
지금도 아쉬운 건 이사할 때 그 많은 만화책을 다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하도 봐서 이제 더는 안 봐도 되겠지 싶었던 게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깝고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다.
대체 이제 그걸 어디 가서 산단 말인가.
 
만화를 끼고 살아서 그랬는지
만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물론 어리숙한 솜씨로 그린 엉터리 만화였지만
그 어린 것이 회색빛 갱지에다 만화랍시고 열심히 그리는 광경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간 뒤부터
동네 만화방에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만화가 좋아서라기보다 그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당구를 치자니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하루종일 술만 먹을 수도 없지 않은가(저녁 때는 거의 매일 마셨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일본만화가 많지 않아
주로 허영만, 이현세, 박봉성 같은 국내 작가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몇 년 후에는 일본만화가 전부 장악해 버렸지만.
난 주로 허영만의 만화를 많이 보았다.
초창기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 그의 작품은 거의 다 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지극히 혐오한다.
그 이유는 나중에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거론하겠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일본만화를 열심히 보기 시작한 것은
도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을 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일본만화가 정식으로 들어오지 않아 손바닥만한 책으로 만든 해적판을 주로 봤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책 사이에 끼고 보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하여간 일본만화는 너무나 새롭고 재미있었다.
그림이 수준도 우리 만화와 너무 다르고
이야기 구성이나 다양성도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만화로 하루를 시작하고 만화로 하루를 끝내는 일본인들의 작품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일본만화가 우리 만화보다 훨씬 낫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화도 하나의 예술장르이기 때문에
단순히 기술적인 면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상적인 측면은 훨씬 저열한 작품도 허다하다.
 
어쨌거나 일본만화라는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자
더 재밌고 신나는 만화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란마><도레미하우스><오렌지로드><슬램덩크><베가본드><쿵후소년> 등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소개할 책 <파이브 스타 스토리>.
 
이 작품은 아주 독특하고 놀라운 만화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제껏 11권이 출간된 이 책을
처음부터 다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도전이다.
이유인 즉, 너무 방대하고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작가 본인도 시인했다시피, 이 책은 작가 생전에 끝나지 못한다.
들리는 말로는 자식한테 넘긴다나 뭐라나...
이 작품에는 우주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것도 우리가 사는 우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우주.
그 우주에 펼쳐진 다섯 개 별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독자를 가장 난감하게 하는 것은 복잡한 역사뿐만 아니라
각 권마다 수십 명 씩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
그들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수많은 파티마(전투 머신인 모터헤드를 조종하는 인간형 사이보그 로봇)
게다가 그들이 모는 모터헤드라는 기묘한 전투 로봇마저 수십 기씩 등장한다.
그 이름들이 얼마나 기기묘묘하고 복잡한지
처음에는 뭐가 뭔지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과연 작가의 머릿속에 얼마나 거대한 용량의 하드디스크가 들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때문에 작정하고 읽지 않으면 처음 1권에서 포기하기 십상인 게 바로 이 만화다.
지금은 제대로 된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기 때문에 번역도 그럭저럭 볼만하지만,
당시에는 전부 해적판이라 거의 기계 번역 수준이라
안 그래도 난해한 내용이 완전히 뒤죽박죽 그 자체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엉터리 번역본을 수 백번 씩 읽으면서
단서를 찾고 이야기의 꼬리를 찾아 붙이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 덕분에 지금은 그 수많은 캐릭터를 다 꿰고 있고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감을 잡고 있다.
다행히도 최근에 나온 책들이 그럭저럭 괜찮아서
그간의 오해들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하여간 독자의 인내심을 철저히 시험하는 심술궂은 작품이면서
그걸 견대낸 독자에게 무한한 보람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주제는
헤드라이너(기사)라 불리는 수퍼 인간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인공 생명체 파티마들이다.
헤드라이너도 결국 인공적으로 육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이 책은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헤드라이너와 파티마들, 그리고 그들이 모는 전투머신 모터헤드.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드라마가 바로 이 책의 주된 이야기인 셈이다.
저자 나가노 마모루는 아예 우주의 역사를 창조한 창조주라 할 만하다.
과연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을 가진 작품이 또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그의 독특하고 섬세한 그림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치 건축 설계사나 의류 디자이너가 그린 것처럼
그 수많은 캐릭터와 로봇들은 각각의 개성과 스타일이 확실하다.
대체 어디서 그런 어마어마한 아이디어를 얻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정도가 되면 만화가를 삼류 예술가로 치부할 수가 없다.
허접한 소설, 허접한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쓰레기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치밀한 연구와 조사, 방대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플롯은
왠만한 장편 대하 소설과 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마 내가 이 작품을 공부하듯이 읽게 된 까닭은 아마 그런 점에 있을 것이다.
만화가 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또는 만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작품은 그런 질문을 무색하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런 눈부신 미덕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아니, 오히려 작가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 작품을 보면 일본인들의 군국주의적 사고 방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또한 강자에게는 절대 복종하면서 약자에게는 무자비한
섬뜩한 인간 본성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책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파티마만 해도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그 가련한 인공생명체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지극히 인도적이면서 지극히 박애주의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결국 더욱더 철저한 도구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일 뿐이다.
파티마는 헤드라이너가 죽으라면 죽어야 한다.
'마스터'라 불리는 그들에게 파티마는 전투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 수동적인 파티마들 중에 마인트 컨트롤(정신 제약)을 받지 않고
기사보다도 월등한 전투 능력을 갖춘 파티마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더 강한 존재를 마스터로 찾으면서 소유물이 될 뿐이다.
가장 강력한 파티마 '라키시스' 또한
영원한 빛의 신 '아마테라스'의 부속물일 뿐이다.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세계관, 인간관을 드러내고 있다.
남성 중심주의, 강자 중심주의, 절대군주주의, 철저한 전체주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자비하고 끔찍했던 가치관이 다 녹아 들어 있다.
 
나는 이 책의 기술적인 면, 치밀한 탐구 정신을 높이 산다.
하지만 어떤 예술 장르이건 간에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이지 기술이 아니다.
독자는 작품에서 그걸 얻음으로써 세계를 다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섬뜩한 주제의식을 가진 책을 미친 듯이 보면서
과연 그 마음속에 그런 사악한 의식이 파고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보면 만화가 소설보다 더욱 위험하다.
소설은 활자 매체라 쉽게 멀리 할 수 있지만,
영상 매체인 만화는 설령 뜻을 몰라도 쉽게 들여다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우주의 역사가 펼쳐지는 놀라운 전설)이
그토록 끔찍한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마 다음 작품이 나오면 나는 또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더러운 것들을 걸러내야 할 것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그토록 놀라운 테크닉을 가진 일본 만화가들이
왜 그토록 끔찍하고 잔혹한 만화를 그려대는가 하는 생각.
물론 그렇지 않은 만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만화가 판을 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종격투기의 본산이 바로 일본이라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죽음과 고통이 흔해지면 무뎌지는 법이다.
삶을 가벼이 여기는 세상은 지옥일 뿐이다.
나는 그런 지옥에서 살고 싶지 않다.
 

by 오즈 | 2010/01/05 18:44 | 오즈가 좋아하는 것 | 트랙백 | 덧글(4)

술담배 끊고

님은 취미는 이제
이것뿐


by 오즈 | 2009/12/24 16:04 | 오즈의 인생공장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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